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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일기-3 (23.04 ~ 24.04)

포닥오퍼를 거절했던 연구소 박사님과의 8시간 미팅

by H2쩝쩝박사 2023. 9. 25.

때는 2주전

 

그룹리더에게서 공지 메일이 왔다.

 

어떤 박사님의 초청 세미나가 있을거라는 것.

 

사실 별거 아닌데, 문제는 그 박사님께 여기 연구소에 오기 전에 면접을 봤고 포닥 오퍼를 받았지만 결국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룹리더도 이 사실을 모르고 그 박사님도 내가 이 연구소로 온 거를 몰랐기 때문에 이 음흉한 사실을 나 혼자 알고 있었다.

 

휴가를 낼까 하다가, 여차저차 그럴 수 없게되었고 (그리고 사실 정면돌파하고 싶었음) 그 전날에 같이 오피스를 쓰는 한국인 박사님에게 이 어이없는 상황을 공유했더니 너무 재밌어하셨다...ㅎ

 

그리고 아침 아홉시가 되어서 그가 우리 오피스 문을 열고 들어왔고, 그룹리더가 사람들을 한명씩 소개해주었다.

 

처음에는 못 알아보시는 것 같아서 휴~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으나, 커피타임때 계속 나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는 나를 알아보았고, 인터뷰 얘기를 꺼내고 이 어색한 만남에서 도망치고 싶어져서 얼굴이 빨개졌지만 너무나도 관대한 그는 "아 너의 마음 너무 잘 이해해! 박사 때 하던 주제가 지금이랑 비슷하니까 오히려 잘 됐지 뭐 가까우니까 같이 일하면 되겠네"라고 하셔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러면서도 그때 인터뷰가 너무 인상적이었다고 해주셔서 빈말이라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 분께서 한시간동안 발표하시는데, 사실 우리 분야랑은 조금 달라서 뭔가 100%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발표하면서 느껴지는 그 분의 표정이나 말투에서 자신이 연구한 내용들이 흥미롭고 이거를 공유하고 싶다 라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내용들이 재밌기도 했다.

 

그리고 그룹리더가 5분 발표를 준비하라고 세미나 전날에 말해줘서 급한대로 대충만들었는데, 다른 분들은 아주 완벽한 슬라이드를 만들어와서 조금 당황했다. 그 박사님께서 연구하고 계시는 장비는 우리에게 정말 매력적인 주제라서 서로 같이 연구할려고 엄청 신경써서 발표하는게 느껴졌다. 나는 사실 아직 그 정도의 결과는 없어서 많은 어필을 하지 못했지만, 다음에는 더 잘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5분 발표라고 했는데 한사람당 1시간의 발표를 돌아가면서 하다보니 총 8시간의 미팅을 그 박사님과 하게되었다. 그 박사님은 되게 발표를 들으면서 오 인터레스팅! 오 그레잇그레잇하면서 8시간동안 지침의 기색없이 발표하는 내용을 계속 흥미롭게 들어주면서 적절한 디스커션과 질문을 하셔서 굉장히 프로페셔널하다고 느껴졌기도 하면서 뭔가 순수한 과학자의 기운이 느껴져서 좋았다.

 

우리 연구실 사람들이나 한국에서 봐왔던 연구자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 분을 보면서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논외이지만 내가 연구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처음에는 남들과는 다른 전문성을 갖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어이없게도 방탈출게임이 재밌었기 때문이다. 뭔가 근거를 하나씩 찾아가면서 탈출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재밌었고 이것을 내 전공에 두어 하고 싶었다. 이렇게 무지성으로 시작한 연구는 당연히 힘들었지만 힘든 과정을 다 지나고 보니 연구가 내 적성에 다행히도 맞는다고 생각이 든다.

 

나는 되게 어떤 일에 쉽게 질려하는 성격이다. 우선 맘에 드는 행위가 생기면 미친 듯이 그것을 하는데, 하다보면 정형화된 패턴을 발견하게 되고 그때부터 무료함을 느낀다. 그 이후에 목표가 없을 때, 뭔가 더 이상 시도해 볼 것이 없을 때 그 행위를 하는게 지루하다. 그런 점에서 연구는 새로운 의견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접목해보면서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 해볼 수 있어서 흥미로운 것 같다. (물론 논문 수정과정에서 새로운 의견을 받아드리는 것은 가끔 마음 아프기도 하지만...)

 

그런 점에서 내가 추구하는 연구의 방향은 의견을 수용하고 새로운 의견을 내는 것에 열려있어야 하며, 당연히 사람과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과정이 조심스러우면서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논리적이어야한다. 그런데 그 분은 그런 점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상당히 멋지다고 생각했다. 멋지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서로 눈치만 보다가 그 분께서 내 실험에 대해서 몇 가지 물어보셨고 오 잘했네멋져멋져 해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나도 생각나는 몇가지 아이디어에 대해서 여쭤봤는데 오오 맞아 그거 그렇게 될 것 같아 라고 해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후.. 열심히 연구해야지...그리고 빨리 코웍하러 가야겠다....

 

살면서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 가끔 마주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글을 적어두어 까먹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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